“종교개혁”이란 용어는 유럽의 기독교를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누게 한 16세기의 독특한 종교운동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전에 이와 유사한 방향의 개혁운동들이 있었습니다. 12세기의 왈덴시안파(Waldensians), 14세기의 위클리프파, 15세기의 후스파가 그런 예입니다. 그러나 이런 개혁운동들은 16세기의 종교개혁과 비교할 때 파급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종교개혁”(the Reformation)하면 으레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운동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16세기 이전에 이미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힘을 합쳐 교회의 개혁을 시도했는데, 왜 그들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16세기의 개혁은 대성공을 거두었을까요? 16세기의 개혁이 유럽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종교개혁 전야의 상황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최악의 상태였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자신의 개인 의사인 리나커에게 네 교구의 담임자의 직책, 세 성당의 부담임자의 직책, 요크대사원의 성가대장의 직책을 주었습니다. 리나커가 아직 신부 서품을 받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여러 개의 성직을 하사받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왕이 자기 주머니에서 직접 월급을 주지 않고 교회의 여러 직책에서 나오는 돈으로 월급을 지급하기 위해서였죠.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프랑스 외교관 안트완은 상(Sens) 교회의 대주교로 임명받았지만 생전에 자기의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죽어서 자기 장례식할 때 딱 한 번 교회에 들어가 봤습니다. 이상의 두 가지 예에서 우리는 당시 교회의 부패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곧 pluralism(한 사람이 여러 직책을 겸임하면서 여러 군데서 월급을 받는 행위)과 absenteeism(목사가 임지에 가서 직접 목회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 거주하면서 월급은 꼬박꼬박 받아가는 행위)입니다. 그밖에도 가톨릭교회에는 고질적인 성직매매(simony)의 문제, 성직자의 불륜 혹은 불법결혼문제 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런 교회의 부패문제가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주요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 종류의 부패는 그 때만 발견되는 문제가 아니라 중세 내내 지속되어 온 고질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매번 개혁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개혁가들은 위에서 언급한 부패들을 해결하자고 단골메뉴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16세기에야 이르러 종교개혁운동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16세기 종교개혁기에만 해당되는 특수한 요인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는 민족주의의 발생과 근대국가의 형성이고, 2) 둘째는 르네상스와 인쇄술의 발달입니다.
1) 민족주의의 발생과 근대국가의 형성: 16세기 초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현상은 근대국가의 탄생입니다. 당시 가장 힘이 세었던 스페인의 예를 들면, 스페인은 15세기말 이사벨라 여왕이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정략결혼을 한 후 그 둘이 힘을 합쳐 그라나다에서 무어족을 몰아내고 스페인 반도를 통일합니다. 그리고 그 후 포르투갈과 나바르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스페인의 세력이 강화되자 이사벨라는 교황에게서 종교재판권(Inquisition)을 얻어내서 스페인 영토내의 모든 감독들을 감시하는 권리를 얻게 되고, 그러면서 스페인 교회의 실질적인 치리자가 됩니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교황이 스페인 교회의 머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스페인 국왕이 스페인의 모든 종교문제를 관할하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의 경우도 스페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아비뇽교황청 시대(1305-1378)에 교황청을 프랑스 영토로 옮겨올 정도로 국왕의 세력이 대단했고 그 후에도 프랑스 왕은 프랑스 교회에 대한 권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516년에 프랜시스 1세는 교황과 볼로냐협정을 맺었는데, 내용은 프랑스 내의 모든 고위 성직자들을 프랑스 왕이 임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프랑스 국왕의 힘이 막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정은 영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 국왕은 15세기에 이미 주요 감독들을 임명할 권한을 교황으로부터 얻어냈고, 16세기에는 로마로 가는 돈을 금지시키고 영국 자체교회인 성공회를 탄생시켰습니다. 독일의 경우는 아직 16세기말까지 통일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전반적으로 서서히 민족주의를 키워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유럽 각국이 자체 세력을 키워나가고 종교의 문제에서 교황의 간섭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교황청의 쇠퇴를 의미합니다. 교황은 더 이상 파문장으로 각 나라를 협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령 교황이 프랑스나 스페인의 교회로부터 어떤 중요한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파문장의 위력만으로는 안 되고 그들과 막후에서 협상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럽 각국의 수도에 교황의 사절들(nuncios)을 파견되어 상주(常主)하기 시작한 것이죠. 또한 이 시기에 교황청은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아비뇽교황청 시대에 아비뇽에 교황청을 새로 짓고 운영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지출했고, 그 후 교황청이 둘로 갈라졌을 때 두 명의 교황이 각자의 입지를 견고히 하기 위해 재정을 축냈고,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도 예술을 후원하거나 전쟁을 하느라 교황청 재정에 심한 손실을 입혔습니다.
그러면 이런 교황청의 쇠퇴가 16세기 종교개혁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종교개혁가들의 입장에서는 교황권이 줄어들고 각국 국왕의 권한이 늘어가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선 개혁을 거부하는 교황을 거슬려 개혁을 시도할 경우 국왕이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루터가 맨 처음 교황을 공격하는 글을 썼을 때 보통의 경우 같았으면 당장 파문당했을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독일 제후인 프레데릭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에는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철이었고 교황은 유럽의 세력균형을 위해 프레데릭이 황제가 되기를 바래서 루터를 특별히 봐주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런 정치적 상황이 무르익지 않아서 초창기에 루터가 파문당했다면 그의 종교개혁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후에 스페인의 찰스가 황제가 된 후 교황이 루터를 파문하고 (더 이상 봐줄 이유가 없으니까) 보름스 국회에서조차 루터에게서 정치적 신변보장을 철회했을 때, 보름스 국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해서 바르트부르크 성에 보내어 안전하게 살게 한 사람도 다름 아닌 프레데릭이었습니다.
종교개혁가들로서는 사실 교황에게 개혁을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교황이 남의 나라에 간섭할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부패의 주범이기 때문에 절대 개혁을 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왕에게 부탁하면 그가 단칼에 개혁의 문제를 처리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1501년 프랑스의 드 암바스 추기경은 파리에 소재한 어느 한 수도원을 개혁하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개혁을 위해 두 명의 감독을 보냈는데, 그곳 수도사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예배실로 달려들어가서 성만찬을 하고 계속 찬송을 불러댔습니다. 4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두 감독들은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파리 시장이 100명의 궁수(弓手)와 경찰들을 데리고 들이닥쳐서, 예배드리는 척하면서 딴청을 피는 수도사들을 제지시키고 포고문을 낭독했습니다. 이로써 수도원 개혁이 효과를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2) 르네상스와 인쇄술의 발전: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족에게 멸망했을 때 많은 비잔틴 학자들이 이태리로 피신을 했는데 그 때 그들은 그리스 문학과 철학을 가지고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태리에서 르네상스(문예부흥)가 일어났습니다. 르네상스의 관심은 고전(古典)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현시대에 다시 일으키는 것이었는데, 당시 우연히도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발명품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구텐베르크의 인쇄활자입니다. 이전에는 책을 만들려면 일일이 손으로 다 베껴야 했습니다. 당연히 책의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었고 값도 비쌌습니다. 제대로 된 책 한 권 가지고 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쇄활자가 발명되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책이 다량으로 출판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책을 구하기가 쉬워졌습니다.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은 이런 변화된 출판문화를 배경으로 발전한 학문방법입니다. 갑자기 책의 수가 많아지게 되면서 같은 책을 여러 권 구해서 서로 비교해 볼 기회가 생기게 되는데 이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책이면 한 글자 틀림없이 서로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책들 각각이 다른 필사본(筆寫本)에 기초하여 출판되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진본을 가리기 위해 학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본문비평입니다.
이 방법이 신약성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종교개혁가들은 이 방법을 사용하여 신약성서의 진본을 가리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지적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Vulgate 라틴어성서를 공식성경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종교개혁가들이 본문비평을 통해 검토해본 결과 그곳에 심각한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회에서는 결혼을 성사(聖事, sacramentum)로 가르치는데 이는 에베소서 5장 32절의 결혼의 “신비”(mysterion)를 “성사”로 잘못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장 2절과 4장 17절의 “회개하라”(metanoeite)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교회의 라틴어성서는 그것을 “고백성사를 하라”(paenitentiam agite)는 말로 오역(誤譯)을 하고 그것을 기초로 신자들에게 고백성사를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운동 덕분에 그리스어 원전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그랬기 때문에 위의 예와 같이 결혼성사와 고백성사의 성서적 근거가 철저히 오류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점은 루터는 당시의 출판문화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라틴어로 95개조를 작성했는데, 이 문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일어로 번역되어 삽시간에 전국에 배포되었고, 곧 이어 각국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출판물의 힘을 직감한 루터는 그 후 인쇄기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고 이것이 유럽의 종교개혁에 대단한 효과를 보았습니다.
이상 16세기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요인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만일 유럽에 민족주의가 강하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국왕이 종교개혁가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쉽사리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 문서비평을 통해 그리스어 원본에 기초한 성서가 출판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인쇄활자의 발명으로 다량의 문서가 단기간에 배포될 수 없었다면 종교개혁의 전개양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모두 하나님이 때를 맞추어주신 덕분입니다. 하나님이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미리 정치적, 학문적 상황을 만들어놓으셨고, 그런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인물들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