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삽시간에 유럽사회 전체로 퍼져나갔고 19세기 초에는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곳곳에 세워진 공장에서 상품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고 그 상품들은 유럽과 그들이 점령한 식민지에서 소비되었습니다. 또 이 시기에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때 철도와 기관차의 발명, 비행기구와 낙하산의 발명, 전기(電氣)의 발견, 원소주기율표 작성 등 과학기술 전반에 걸친 놀라운 진보가 있었습니다. 이제 19세기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더 이상 퇴보하지 않고 항상 진보할 것이며(헤겔), 자연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진보한다고 믿었습니다(다윈).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교회만은 비이성적인 “미신”에 사로잡혀서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과거만 바라보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1789-1815)은 이성의 법칙에 따라 무력으로 교회를 개혁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혁명에 동조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단두대에서 처형시켰고 성경의 계시에 기초한 종교대신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종교를 강요하였습니다. 1815년에 나폴레옹이 워털루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한 후에도 혁명의 기본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은 계속 남아서, 이후 사람들은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의 수위를 점점 더 높여갔습니다.
사람들이 과학과 이성에 기초하여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개신교와 가톨릭의 반응은 아주 달랐습니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런 근대 사상의 도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과학과 이성의 방법으로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지만, 가톨릭 신학자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근대사상의 도전을 무시하거나 정죄하였고 심지어 교황무오설(敎皇無誤說) 같은 극단적인 교리들을 만들어냈습니다.
1) 개신교의 대응: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기독교와 근대사상을 조화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노력했습니다. 우선 그는 죄를 실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미발달(underdevelopment)의 상태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죄로 부를 경우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죄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단계로 발달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죄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심각한 죄의 문제가 생겨났을 때 그것을 너무 비관적으로 다루는 대신, 좋은 상황과 좋은 교육을 통해 사람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데 관심을 가지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죄는 사탄에게서 나오는 어떤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미발달의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이니까요. 인간의 죄성에 대한 너무 안이한 생각이죠. 또한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감정”으로 정의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은 물론 일시적인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절대자에 대한 깊은 의존의 감정을 말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성경과 기독교가 비이성적이라는 비판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만일 종교의 본질이 신의 특별계시나 도덕적 교훈이나 합리적 논리가 아니라 그에 대한 전적인 의존의 감정이라면, 우리는 성경의 역사성이나 문자적 의미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이 글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이 "절대자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슐라이어마허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는 믿지 않지만,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든 모든 피조물이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기만 하면 제대로 된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헤겔(1770-1831)은 역사는 정/반/합(正反合, thesis/antithesis/synthesis)의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기독교를 "절대종교"(the absolute religion), 즉 가장 마지막에 출현하는 완성된 종교로 보았습니다. 모든 종교의 중심에는 인간과 신의 관계성이 있는데 기독교에는 그 관계성의 완성격인 성육신(Incarnation)이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는 삼위일체 역시 정반합의 과정을 거친 마지막 완성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 정: 성부는 영원한 존재,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존재; 2) 반: 성자는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온 존재,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존재; 3) 합: 성령은 하나님이 영으로 신앙공동체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것. 다음 세대의 바우르(1792-1860)도 같은 방법론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1) 정: 베드로의 유대주의적 기독교; 2) 반: 바울의 헬라주의적/보편주의적 기독교; 3) 합: 2세기의 기독교.
이상 개신교 학자들의 예를 들어보았는데 우리는 그들에게서 다음의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19세기의 사상적 분위기를 대표하는 진보론과 낙관론이 그것입니다. 당시 개신교 신학자들은 세속 사상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일시적으로 퇴보할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볼 때는 항상 발전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인간의 죄성을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진보와 함께 인간의 도덕성과 합리성도 진보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비록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또 식민지 개척으로 인한 부작용들이 많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일시적인 현상이고 더욱 발전된 형태의 근대화가 이루어질 때 그런 문제들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이런 낙관론이 후퇴하게 됩니다. 역사는 반드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인간의 죄성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2) 가톨릭의 대응: 개신교 신학자들이 근대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유주의 쪽으로 기운 반면 가톨릭은 철저히 보수주의를 유지했습니다. 근대사회의 요구들을 들어주면 교회의 권위가 무너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교황은 이 혁명의 정신이 다른 나라에 퍼지는 것을 최대한 방해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 주장하는 자유, 평등의 사상이 교황권에 절대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이지요. 당시 프랑스의 혁명정부는 교회제도를 합리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종교법을 발표하고 모든 성직자에게 교황 대신 프랑스 정부의 지배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국가가 직접 성직자를 공무원처럼 임명하고 월급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혁명정부는 비합리적인 가톨릭 종교에 대항하여 "이성의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성경에서 합리적인 것만을 뽑아서 믿겠다는 것이죠.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1798년 군대를 보내서 로마시를 점령하고 로마를 공화국으로 선포해버렸습니다. 이제부터는 미신(迷信)의 우두머리인 교황이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로마의 교황들이 근대사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는 뻔한 이치입니다. 그들은 프랑스혁명에 데어서 민주적/공화적 이론들을 몽땅 배격하였습니다. 근대이론을 받아들이는 신부가 있으면 그들을 모두 파문시켜버렸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더욱 보수적으로 나갔습니다. 피우스 9세(1846-1878)는 자신의 재임기간 중 로마가 공화국으로 선포되면서 바티칸 이외의 모든 지역을 잃어버렸는데, 어느 날 난데없이 “마리아 무흠수태 교리”(無欠受胎敎理, Dogma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of Mary, 1854)를 발표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이론이지요. 사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론이기 때문에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오랫동안 결론이 나지 않았던 것인데 피우스는 공의회도 거치지 않고 자기 혼자서 이것을 단숨에 교회의 교리로 공포해 버린 것입니다. (참고: 마리아 승천의 교리는 1950년 피우스 12세 때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교리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종이호랑이로 변해버린 교황의 말에 대꾸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교황은 이것을 좋은 징조로 받아들여서 이제는 더욱 대담하게도 “오류목록”(syllabus of errors, 1864)을 발표하고 그것을 통해 가톨릭교회가 금하는 근대사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제시하였습니다: 자유주의(신학방법론이 현재의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것), 합리주의(종교도 이성의 척도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 개신교도 기독교의 일부라는 주장, 교회가 세속권력/군사력을 가지면 안 된다는 주장, 각국이 자체의 교회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 신학교를 제외한 모든 학교 운영에 교회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국가와 교회가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 등. 그리고 피우스는 1870년 교황무오설(papal infallibility), 즉 교황이 교리로서 선포하는 내용은 신적인 무오성(divine infallibility)이 있다는 교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물론 교황이 이런 주장을 해도 별 저항이 없었습니다. 이미 교황이 힘을 다 잃었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