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프론티어

어떤 시간은 그 속에, 앞으로 닥아 올 하나의 예언같은 것을 담아 가지고 우리를 찾아 온다,

다만 우리가 그때는 모르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서 어느 순간, 아! 그때 그 순간이 이런 뜻을 담고있었구나 하며 무릎을 치고는 한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야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시던 말씀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되는 사건이라던지, 또,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린다면 국화꽃이 핀 다음에야 왜 그렇게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 댓는지, 또 먹 구름 뒤에서 천둥이 울었는지 알게 된 것 같은 그런 예언의 시간 말이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반장집 딸 아이가 그 시간 속에 함께 있었다

625 전쟁은 학교 입학하는 학생들의 나이를 들쑥 날쑥하게 만들어서 시골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여섯 살 먹은 동갑네기 보다는 두 세살이 더 많은 아이부터, 제일 큰 여자아이 한명은 나 보다 네살이나 더 많은 열살짜리도 있었다.

반장집 딸 아이도 그 중에 하나였다. 같은 학년에 입학했지만 나보다 두살이나 나이가 많고 키도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면서도 내 옆을 맴돌며 내 옷을 만져 보고는 이쁘다, 따숩것다, 하던 아이다.

그때 내가 입고 있던 옷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담요에 자주색 물을 들여,엄마가 만들어 준 어깨에 맬빵이 달린 바지였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시절이라,모든 것이 부족하던 그 때에는 ,미군 부대 담요로 만들었을 망정, 자주색으로 물들인 모직 바지가 아이들에게 부러움을 샀던 것같다.

반장집 딸 아이는, 항상 검정색 물을 들인, 광목 통 치마에 흰 저고리,그리고 코가 없는 검정색 남자 고무신을 신었고 버선을 신고 있었던, 반장집 딸 아이, 나는 이제 그 아이의 이름도 잊어 버렸다.

그러나 그날, 그 아이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나물을 캐러 가자고 하던 날은, 총 천연색 시내마 스코프 영화처럼 가끔 내 머리 속에서 상영 되고, 여섯살 먹은 아이가 그때는 이해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인생의 페턴을 다시 보곤 한다.

봄이 가까이 와 있던 날, 그래도 바람은 쌀쌀하게 불고 있던 일요일,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가보니 대문 뒤에 반장집 딸과 또 그 아이와 비슷하게 나이 먹은 같은 반 아이가 서 있었다.

나물을 캐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면서, 부엌에 가서 뾰쪽한 꼬쟁이 같은 것 하고 나물을 캐서 담을 보자기 하나도, 그리고 누룽지 같은 것도 있으면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부엌에서는 꼬쟁이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아서 무 껍질을 벗길때 쓰는 끝이 달아 빠진 놋 숫가락을 집어 들고, 부뚜막 위에서 상을 덮고 있는 상보를 걷어서 누룽지도 찾아서 얼른 가슴을 두근 거리며 나왔다.

엄마에게 말을 했는지 그냥 나왔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나물을 캐러 멀리, 그것도 어른들이 없이 아이들 끼리만 간다는 일이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들 바람은 차가웠다. 반장집 아이가 그렇게도 부러워하던 자주색 담요 바지도, 그 바람을 막지 못할만큼 코 끝까지 추었던 기억이난다.

그래도 우리는 누룽지를 나눠 먹으면서 봄 나물을 찾아 다녔다. 햇볕이 잘 드는 능선에서 쑥같은 나물을 숫가락 끝으로 뿌리까지 캐어 내는 기술을 반장집 딸이 보여주면서 나에게도 그대로 해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숫가락으로는 아직도 차가운 땅을 파서 나물을 뽑아 올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두 아이가 여기 저기를 다니며 나물을 캐다가 돌아와서, 내 보자기를 들여다 보더니 풀을 골라 내고 얼마 남지 않은 내 나물 보자기에, 반장집 딸은 자기 보자기 속의 나물을 한 웅큼 집어 넣어 주면서 하는 말이, 날씨가 아직 추어서 나물이 많이 없으니 언덕 아래에 있는 밭에 가서 시금치를 캐자고 하였다.

옆에 있던 같은 반 아이도 추우니까 빨리 캐서 내려 가자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물 캐던 곳에서 멀지 않은 언덕 바지에 시금치 밭은 있었고 초가집도 몇채가 먼 발치에서 보였다.

초록 빛으로 촘촘하게 바람 물결을 내고 있는 보리가 처음에는 시금치인줄 알았는데, 멀리서 보았을 때는, 빈 땅 같아 보이던 보리밭 옆에서, 아직은 잎을 다 키우지 못했어도 줄을 지어 자라고 있는 것이 시금치라고 했다.

반장집 아이와 또 다른 아이의 보따리가 금새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일 정도로 아이들은 점점 밭 가운데로 들어가서 고개도 들지 않고 시금치를 캐는데만 열중하고, 나도 밭 가장자리에서 이제는 숫가락으로도 나물을 잘 캐고 있는 나를 신기해하며 추운 것도 잊어 버리고 있었다.

어떤 인기척 같은 느낌에 눈을 들었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언덕 밑에서 늙은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젊은이도 아닌 농부 같은 아저씨가 우리 쪽으로 올라 오는 것이 보였다.

여섯살 먹은 나에게는 그 사람이 밭 주인이고 우리가 지금, 남의 밭에서 시금치를 캐고 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두 아이들이 밭 가운데서 시금치를 캐느라 저고리 밑으로 내복이 다 보이도록 허리를 굽히고 있을 때 ,농부는 밭 가운데로 뛰어 와서 두 아이의 팔을 한꺼번에 낚아 채서 끌고 나갔다.

누가 와서 매번 시금치 밭을 망쳐 놓나 했더니 너희들이었구나, 화난 농부의 목소리와 ,우리가 아니라고, 처음 온거라고 변명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조금 높은 곳에 서있던 나에게 메아리처럼 들려 오다가 사라졌다.

농부 아저씨가 계속 화를 내며 야단 치고 두 아이는

손을 비비며 빌고, 한참을 소리쳐서 야단치던 농부가 두 아이의 나물 보따리를 뺏어 들고 언덕 밭 고랑을 내려 가려고 하던 그 때다.

농부가, 뺏어 든 보따리를 두 손에 들고 몸을 돌리던 바로 그때, 반장집 딸이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나를 가르켰다.

" 아저씨, 저기 있는 자 한테도 시금치 보따리가 있는데요,"

몸을 돌려 내려 가려던 농부가 다시 몸을 돌려 나를 쳐다 보았고. 농부의 눈과, 반장집 딸의 손 가락이 나를 향해 와서 머물렀다.

그 시간은 소리도 없었다. 배경도 없었다. 나의 숨소리도 멈추게 하였다. 모든 것이 나를쳐다 보고 있었고 모든 것이 정지된 순간, 얼만큼의 순간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농부 아저씨가 다시 몸을 돌려 보따리 두개를 끼고 내려가자, 내 심장도 다시 뛰기 시작했으니까.

농부 아저씨가 반장집 아이의 손가락을 외면 하고, 그 아이들의 보따리만 들고 내려 가는 뒷 모습이 살아질 때 까지 나는 그냥 멍 하게 서 있었던 것 같다.

두 갈래로 땋아 내린 내 머리 끝에서, 엄마의 옷 고름을 잘라 만든 진 분홍 유똥 리본이 바람에 부르르 떠는 소리만 들렸다.

농부 아저씨가 왜, 어떠해서 내 보따리를 뺏어가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궁금하다.

그러나 나중에야, 나중에야 깨닫게 된 것은.그날의 반장집 딸의 손가락과 ,농부가 뺏어가지 않은 나의 시금치 보따리가, 앞으로 펼쳐질 나의 삶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율법과 은혜의 페턴이었고, 그리고 또 내 곁에는, 은혜로 내 것이된 보따리가 항상 남겨져 있을거라는 믿음을 예언한 날이었다는 것이다.

그날 어떻게 집으로 내려 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반장집 딸과의 관계가 계속 된 것 만은 확실하다. 늦은 봄무렵, 반장집 딸이 감 꽃을 실에다 꿰어 목거리를 만들어 가지고 찾아 왔다. 자기집 뒷 마당에 감꽃이 많이 떨어져 있으니 가서 목거리를 만들자고, 정말, 감 꽃은 하얗게 반장집 담 밑에 떨어져 있었다.

반장 집은 앞쪽은 작은 가게로 되어 있고 뒷쪽에는 길쭉하게 마루가 먼저 있고 안방으로 들어 가는 창호지 문이 있는 양철 지붕 집이다.

내가 마루에 앉아서 감 꽃을 고르는 동안 안방으로 실을 가지러 들어간 반장집 딸이 나오면서 어제 밤에 자기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다고 입에다 손을 댄다.

그리고 감 나무 옆에서 태우고 있는 것이 탯줄이라고 했다. 나는 아이를 볼려고 마루를 조금 더 올라가 창호지에 붙어 있는 손 바닥만한 유리창으로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방안은 너무 어두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창 문도 없이 앞 뒤로 차단된 방 안에 있을, 어제 밤에 태어난 아기는, 밝은, 오월의 푸른 빛과 하얀 감 꽃에 부셔진 내 눈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탯 줄을 태우는 연기가 하얗게 올라가는 것만 고개를 돌리는 내 눈에 들어 왔다.

이것 또한 나중에야 더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눈은, 깊은 곳에 있는 생명의 실체보다, 연기 속으로 태워져 가는 껍질을 먼저 보게 된다는 것도.

반장집 딸은 나에게 좋은 사람도 자기 것을 빼앗길 때는 나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켜 주었다. 그리고 내가 지나가야 하는 어린 시절이라는 기간을 조금은 짧게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