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프론티어

우리 집안 식구들에게 아버지의 첫 사랑은 비밀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직접 그 이야기를 수필로 남겨 놓으셨으니까.

아버지는 아직도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 50에 녹내장이라는 병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는 다 잃어 버리시고 돌아 가실 때까지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세계를 이야기와 글로 남겨 놓으셨는데, 글은 자신이 직접 쓸 수가 없어, 누군가에게 받아 쓰게한 원고 뭉치를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떠나셨다.

그 원고 뭉치 속에 아버지의 첫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대동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아버지가 기미요라는 18세의 일본 소녀를 만나며 시작된 사랑 이야기는 요즘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사랑도 아니겠지만, 아버지의 일생을 통해 남겨진 기미요의 화석을, 나는 고고학자가 유적을 발굴할 때 느끼는 전율과 함께 찾아내면서,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라면, 세월 따라 그 모습이 변한다 해도 본질은 살아 남아 영원까지 간다는 것을 믿게 만든다.

기미요는, 아버지의 표현데로라면, 나이에 비해 의젓한 첫 인상에, 예의 바르고 상냥하며, 학교 신문에도 매번 글이 실리는 눈이 큰, 문학 소녀라고 적혀 있다.

음악을 사랑하며, 피아노 실력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치는 수준이고, 또 꽃꽂이를 잘 했다고 적혀 있는데, 사랑을 하게되면 눈이 머는 법이니, 글쎄, 아버지 말을 그대로 믿는 것도 자식 된 도리일 것이다.

요시오라는 이름의 친구 집에 초대 받아 간 것이 기미요를 만나게 되는 자리가 된다.

요시오는 아버지가 조선에서 온 학생이라고 소개하자, 먼저 다가와 친구가 되었는데, 그는 시골 학교 선생님인 어머니를 떠나, 대학은 학교 근처에 있는 외삼촌 댁에서 다니고 있었다.

상해와 독일에서 공부한 요시오의 외삼촌은 친 자식이 없어, 요시오뿐만 아니고 어머니를 일찍 여윈 외숙모의 조카 기미요를 데려다 기른 진실한 크리스찬 지식인이었다고 한다.

기미요가 조선 유학생 아버지를 사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수필 속에는 두 사람이 한번도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이 없고, 대부분 요시오와 함께, 집에서 차를 마시거나 음악을 들으며 기미요가 읽고 있는 책, 주로 세계 문학 전집과, 밀턴의 실락원같은 고전, 일본의 향가와 같은 만엽집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길게 써있고, 또 어떤 날은 기미요가 꽃꽂이 하는 것을 보며 서로 좋아하는 꽃이 무슨 꽃인가를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2년 동안의 만남 속에서 그래도 로맨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장면이 두어번 나오는데, 한번은 오페라 <춘희>를 보면서 기미요가 눈물을 흘리자, 아버지가 얼른 기미요가 무안해 할까 봐 고개를 돌렸다는 장면이고, 또 한번은 밤 낚시를 갔을 때, 보름달이 떠서 강 물 위로 흐르는 것을 보며 강 속에 있는 달이 더 이쁘다고 기미요가 감탄하자 아버지가 '월강' 이라는 아호를 지어주는 장면이다.

그 다음부터 기미요에게서 오는 선물, 책 표지 뒤에는 월강, 기미요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만약 아버지와 기미요의 사이에 슬픈 이별이 없었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마지막 학기 시험 준비를 하던 가을,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기미요를 찾아가는 장면을 아버지는 자세하게 그려 놓으셨다. 전차 종점에서 들어간, 바닷가의 병실에 누어 있던 기미요는 요시오와 함께 찾아 간 아버지에게, 염려를 끼처 드려 미안하다고, 곧 좋아질거라고 하면서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버지는 가지고 간 춘원의 소설 <무명>을 침대 머리 맡에 놓고 나온다.

선물을 손에 쥐어 주지도 못하고 머리 맡에 놓고 나오는 아버지, 바닷가의 좋은 공기를 마셔야 하는 기미요의 병이 무슨 병인지를 참아 쓰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몇번이나 고개를 돌리고 기침을 했다고만 적어 놓으신 우리 아버지, 그리고 어느날 요시오로 부터 오후 기차로 기미요가 시골 요양원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하숙 집에 들려 월간지 속에 십원 지폐 두장을 끼어 넣고 역으로 달려 간다.

기차 역에는 요시오와 요시오 외삼촌 내외가 벌써 나와 있었고 기미요는 기차 속에 외삼촌 댁 하녀와 함께 앉아 있었다. 거기서 아버지는 또 다시 가지고 간 선물을 기미요의 손이 아닌 기차 창 가에 올려 놓는다.

둘이 주고 받은 말은 없었는지, 눈 빛만이라도 주고 받았는지, 이제는 알 길이 없는데, 수필 속에는, 기차가 움직이자 기미요가 미소를 띠우면서, 눈에는 눈물이 고인체 손을 흔들며 떠났다고만 적혀 있다.

이제 스무살 정도 되었을 기미요가 죽음의 두려움과 이별의 슬픔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며 지어보는 미소, 이런 기미요의 미소를 아버지는 모나리자의 미소 속에서 보았을까, 내가 어렸을 때 처음 기억하는 아버지는 모나리자 그림이 걸려 있는 아버지의 서재와 함께한다.

나중에 엄마에게서도 들은 이야기이지만, 아버지는 첫 딸인 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자, 모나리자 그림을 가리키면서 내가 이름을 외울 때까지 가르치셨다 한다.

물론 엄마는 모나리자와 기미요의 관계를 꿈에도 모르셨을 것이다. 나도 나중에 아버지의 수필을 읽고서야 짐작해 본 나의 상상이니까.

수필 속에 들어 있는 기미요의 서재는 곧 아버지의 서재였다.

기미요가 읽었던 책들이 그대로 있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 책들을 다 읽으며 커갔다.

아버지는 기미요에게도 그랬듯이, 책을 사서 내 손이 아닌 책 꽂이에 꽂아 놓으시면,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해 사 온 책처럼 밤을 세며 읽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