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프론티어

금년이 419 의거가 일어난지 50년이 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다. 4월 19일이 매년 찾아 왔으련만 거의 잊고 살다시피 한 1960년 봄, 자고 나면 들려오는 소문과 아직 정치를 몰라서 다 이해 할 수 없었던 외침과 수군거림이, 엉뚱하게도 바나나와 함께 기억에 떠올랐다. 이런걸 프루스트[Proust] 현상이라고 한다던가, 잊어 버린 어떤 사건을 음식이나 냄새와 함께 기억하게 된다는, 프랑스 심리 소설가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따온 말이다.

나는 그 해 봄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 있었다. 새 학기는 시작 되었어도 학교는 이승만 정권에 반항하는 학생 데모 때문에 거의 휴교 상태였다.

서울보다 먼저 부산과 마산에서 시작된 학생 데모가 매일 거리를 휩쓸자,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담임 선생님들에게 가정 방문이라는 형식으로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여 부모님에게 데모를 막아 주십사고 부탁하고 다니게 하였다.

그때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새로 부임하신 체육 선생님으로 기억되는데, 학교 시작한지 일주일 만에 휴교로 들어가 버려서, 학교 사정도 학급 사정도 모르셨던지, 우리 집에 오셔서는 선생님이 오히려 나에게 학교와 반 아이의 형편을 더 많이 물어 보시는 가정 방문이 되어 버렸다. 그때는 전화가 있는 집이 드물던 때여서, 선생님이 가져 오신 명단을 보고 내가 이 아이의 집을 안다고 하면 그 아이의 집으로 가자고 하여 다음 집까지 모셔다 드리면 나의 차례가 끝나는 그런 순서였다.

우리 집은 부산 의과 대학병원 버스 정거장에서 불란서 영사관 쪽으로 올라가는 동네로 서울 수복하면서 영사관도 서울로 옮겨 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불란서 영사관 옆 동네라고 불렀다. 그 시절 부산에는 일본 사람들이 지어 놓고 간 집들이 많아서 우리집도 ㄱ자 골목을 따라 비슷한 모습의 집들을 방 4개에, 마당도 없이 지어놓은, 다다미 방이 딸린 집이었다.

물이 귀해서 물 장사 할아버지가 물 지게로 물을 배달해 주면, 먹는 물은 항아리에, 세수 물은 쇠 가마처럼 생긴 일본식 목욕탕에 부어놓고 사용하였다.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는 김 필례씨 집만은 수돗물도 가끔 나오는 양옥집이었다. 마당도 있고, 담장 넘어 찔레꽃이 피면 골목 안이 환해 지던 것이 지금도 눈에 보인다. 김 필례 할머니는 3.1. 운동을 하셨다는 신식 할머니이고, 결혼도 하지 않고 YWCA에서 여성 운동을 하시는 분으로, 집안 일을 하는 노 처녀와 둘이서만 살고 계셨다. 나는 그 집에서 처음으로 침대가 놓인 서양식 침실과 전기스텐드, 식탁이 놓인 부엌을 보았다. 나중에 나도 시집 가면 저런 집에서 살아야지 했는데, 정말 지금까지 40년을 미국에서 살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바나나가 그 때 부산에서는 쉽게 살 수 있는 과일이 아니었다. 광복동의 외국물건 파는 데서 가끔 보이기도 하지만, 있다 해도 가격이 비싸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맛을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기붕씨 가족이 자살 한 뒤 그 집에서 발견된 온갖 외국 과일 중에 바나나도 있었다는 신문 기사가 나기 전까지는 바나나라는 과일이 신문에서 보다는 소설 책 속에 나오는 과일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오신다는 날, 엄마는 커피와 바나나를 준비 해 놓았다. 우리 집이 바나나를 사 먹을 만큼 부자가 아니었는데, 마침 그 전날 아버지 회사에서 외국 화물 선박이 부산항에 도착하여 짐을 내릴 때, 조사를 나갔던 아버지가 외국인 선원에게서 얻어 온 바나나 세 개 중 두 개를 선생님 드린다고 엄마가 얼른 감추어 놓은 것이다.

하나는 토막 내어서 온 식구가 맛만 보았다.

드디어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신 날, 걸어서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시던 선생님은 피곤 하고 목도 마르셨던지 커피와 바나나를 맛있게 잡수셨다. 처음 바나나는 함께 먹자고 나에게 손을 내미셨는데, 예의로 사양하였더니 두 번째 바나나는 묻지도 않고 그냥 다 잡수시었다. 그때 나에게는 눈 앞에서 사라지는 바나나만 보였고, 앞으로 나에게 가져다 줄 바나나의 효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419가 터지면서 바나나의 위력이 시작 되었다.

기억하겠지만, 419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민주화 운동이다. 학생들이 모든 일에 참여하게 되면서, 학생 대표 위원회가 생겨났다. 대학이나 고등학교에서는 피를 본 학생들의 위세가 등등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 나고 난 다음, 학교가 다시 문을 열기 전에 학생 대표 위원회에서는 독재 정권에 협력한 선생님들도 물러 나야 한다고, 중학교에서도 학생 대표 위원회를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 오자, 담임 선생님은 나를 우리 반 대표로 추천하였다. 바나나로 하여금 내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시킨 이유가 아니었을까? 3학년의 한 반에서 한 사람씩을 뽑아 조직된 회의는, 독재 정권에 협조한 선생님 이름을 칠판에 써 놓고, 명단에 넣을 만큼 독재에 협력 했는지를 손을 들어 결정 하는 방법이, 마치 공산주의 숙청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었다.

나는 정말 그 자리에서 도움이 안 되는 학생이었다. 독재 정권에 협력한 선생님을 가려 내는 자리가 아니고, 차라리 방귀를 잘 뀌는 선생님이나 욕을 잘 하는 선생님, 말할 때 침이 튀어 나오는 선생님 이름을 대라면 몇몇 선생님 이름이 바로 나왔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나의 중학교 3학년은 시작 되었으나, 바나나는 계속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졸업 할 때까지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심부름이나 학교 일로 수업 시간을 빼 먹을 수 있는 특혜도 주었고, 검사 딸이 대구에서 전학 왔을 때도 나에게 먼저 소개 시켜 주면서 검사 딸인데, 네가 새 학교에 적응 할 수 있도록 도와 주라는 특별 임무까지 주시었다. 50년 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바나나가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