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프론티어

겨울 비가 유리 창을 두드리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비 바람이 억 수로 몰아 치던 어느 해,
겨울 날, [퍼시픽그로브] 에 있는 한 미술 전시장에서 만난 두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친구의 딸, 마리아가 그림 전시회를 한다고 초대장을 보내 온 Opening Reception 에는 갈 수 가없어서 전시회 마지막 날에 나 혼자서 가 보겠다고 친구와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약속한 날이 되었을 때는 이틀째 비 바람이 몰아 치고 있어서 한 시간 반을 운 전을 하고 <퍼시픽그로브>까지 간다는 것이 망서려 졌다.

빗 발이 좀 약해지나 하고 창 밖을 내다 보고 하늘도 쳐다 보고 두 마음이 갈까 말까 팽팽하 게 밀고 당기고 하던차에, 날짜를 기억하고 있던 마리아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걱정이 되어서 전화 한다고, 오늘같은 날은 운전 하는 것이 위험하니 떠나지 말라고 한참을 말리다 끊는다. 기다려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 때는 더 더욱,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이 내 옆에서 굴러 다니고 있었 다. "약속"이라는 뜻, 이런 저런 이유로 지키지 못하고 내 머리 속에서 빙빙 돌고만 있는 약 속들, 그 날 내가 비 바람 속으로 차를 몰고 나간 이유도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 서였다.

그러나,101 프리웨이로 접어 들면서 비는 더 굵게 쏟아지기 시작했고 바닷가 쪽을 향해 가 는 156번 도로에서는 비가 얼마나 퍼 붓는지 길 가운데 그려져 있는 차 선도 보이지 않아 기어 가듯 운전하면서 내가 오늘 나 하고의 약속을 지킨다고 호기를 부리며 떠난 것을 후회 하며, 나도 이젠 미쳐 가는구나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퍼시픽 그로브]는 날씨만 좋다면 골동품 가게가 있는 길을 기웃거리며 맛있는 음식 냄새 도 들여 마셔가며 걸어 다녀 볼 만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전시회장은 골동품 가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빅토리안 목조 건물 2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 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이런 빗속에서 그림 구경하러 오는 사람은 미친 사람 뿐일거라 중얼거리며 층계를 올라 갈 때, 삐걱 거리는소리와 비에 젖은 목조 건물에서 나오 는 습한 냄새가 사람이 없다는 것을 더 말 해주고 있었다.

그림과 나 혼자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는 전시장에 서서 한참을 보냈다. 비가 좀 뜸해지기 를 기다리며, 벽에 걸린 마리아의그림 속에서 하얀색 물감, 회색 물감이 벽을 타고 내려와 골이 패인 마루장 사이로 흘러가는 환상을 가질 무렵 누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젊은 남자와 여자였다. 둘 다 검은 색 바지에 터들 넥 스웨터를 입은 모습이 예술가의 냄새 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여자의 얼굴은 뒤로 매어진 갈색 머리카락 사이에서 사랑 스러웠고, 남자도 유 럽풍의 다정함과 날카로움이 잘 조화된 모습이 검은 터들 넥 위에서 더 돋 보였다.

그들은 문을 들어 서자 마자 나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마치 내가 투명 인간이기나 한 것 처 럼 손에 들고온 CD PLAYER를 내려 놓은 다음, 아무 말도 없이, 약속이라도 하고 온 것 처 럼, 음악이 흐르자 익숙한 몸 짓으로 춤을 추기 시작 했다.

크라시칼 기타의 부드럽고 로멘틱한 음이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섞여서 오묘한 분위기 속으로 끌고 들어 갔다.

연인들이겠지? 그들의 절제된 춤 동작이 BLACK이라는 옷 색갈 위에서 살아나기 시작했 다. 하얀 벽이 살아나고 마리아의 그림도 살아나서 춤의 배경이 되어 함께 움직이고 있었 다. 궁금했다.

아름답고 젊고, 예술을 사랑하는 두 사람이 이처럼 비가 퍼 붓는 날, 기타 음악에 맞추어 서 로의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인가? 아니면, 가난한 예술가에게 찾아오는 이별 앞에서, 사랑하지만 잠시 헤어져야 하는 슬픔을 이런 몸 짓으로 표현 해 보는 자리인가?

아니라면 춤을 추기로 약속한 날이 오늘인데 그들도 나 처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 작정 빗 속을 달려온 것일까? 나는 마음 먹었다.

이제, 음악이 그치면 Hi,하고 인사하면서 왜 오늘 같은 날 이런 장소에서 춤을 추는지,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인지 물어 봐야겠다고 음악이 끝 나기만 을 그림을 보는 척 하면서 기다렸 다. 나의 주책을 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결국 그 말을 그들에게 물어 보지 않고 떠나 왔으니까.

음악이 끝났으나 그들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어서 내가 다가설 틈이 보이지 않았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듯 했으나 그들은 이미 먼 곳에 있는 듯 보였다. 음악이 그쳤는 대도, 내가 쳐다 보는대도 그들은 둘 만의 세계에서 춤을 추었다. 마루 위에서 스치는 그들 의 발 소리만 들렸다. 다시 기타 소리가 시작하였다.

그 것이 귀에 익은 아랑후에즈 협주곡 2악장이라는 것을 알아 차릴 무렵에야 , 그때야 나는 알았다. 그들은 지금 <퍼시픽 그로브>미술 전시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랑후에즈 궁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시간조차도 벗어 버리고 떠난 듯, 그들의 표정이 그랬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내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의 젊은 날이 그들 속에서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나이가된 그들이 내 속에서 그들의 젊은 날을 돌아 보고 있었다.

잠시 그 둘과 나는 하나가 되어 춤을 추었다. 정말 그랬다. 그러다가 갑자가, 나는 그 장소 들 그들, 둘만의 공간으로 남겨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제한 된 시간 속으로 끼어드는 그 어떤 것도 막아 주고 싶었다. 두 사람의 이름을 몰라도 좋았다. 그들이 어떤 사이라도 좋았다. 그냥 그대로 보기에 좋았다. 나는 가만히 소리도 내지 않고 얼른그 곳을 떠나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156번길을 벗어나 101번 프리웨이부터는 빗 줄기가 약 해 지더니 ,< 길로이>근처부터는 햇살이 구름 사이로 나와서 비에 젖은 풀잎 위에 연 초록 물감을 입혀가지고, 캘리포니아의 겨울이 살아 있다고 흔들거렸다. 85번 프리웨이에 들어 섰을 때는 산 옆으로 무지개가 길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하신 무지개의 약속 이 생각났다. 그 날은, 하나님도, 나도, 그리고 아랑후에즈 궁에서 춤추던 그 들도, 모두 약속을 지킨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