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프론티어

625 전쟁이 가져다 준 비극 중의 하나가 생 이별이다.

어른들의 낮은 목소리에서 숙부가 이북인지 어디로 넘어 갔다는 소리와, 숙모님은 젊은 나이에 갓난쟁이 딸 하나 데리고 생 이별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내 나이 대 여섯 정도였으니, 사회주의가 어쩌고하는 뜻은 몰랐어도 숙모가 불쌍하게 되었다는 것 만은 알아 들었다.

숙모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분이었다.

그 시절, 신식 여인들이 입는 종아리가 살짝 보이는 통 치마에 구두를 신고 우리집으로 오시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숙모가 이화여전에 다니던 시절, 두 청년이 숙모에게 사랑을 고백하였는데, 한 청년이 나의 5촌 숙부이신 연희대 국문과 학생이고, 다른 청년은 세브란스 의과대학생이었다.

숙모님은 연애 편지를 멋있게 쓰는 문학 청년을 택하셨다.

이런 얘기들은 내가 좀 더 자란후에 친척 언니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어서 알았는데, 내가 남의 말을 몰래 듣고 다닌게 아니라 한국 집 구조가 마루에서 얘기하면 문을 닫고 있어도 창호지 문 사이로 다 들리게 되어 있었다.

또, 언니들은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겠냐고 소리만 낮추고 얘기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흥분하여 자기들끼리 소리를 높히며 "나도 그런 연애 편지 받아 보았으면"하고 낄낄거렸다.

숙모님의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숙모님의 딸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면서 우리집을 찾아왔을 때다 엄마가 "너의 어머니도 안녕하시냐"고 물으면서 동생은 몇이나 생겼냐, 새아버지는 어디서 병원을 하는지도 물었다.

숙모가 재혼하신 것은 친척 어른들이 찾아오실 때 마다 집안 뉴스를 듣게 되니까, 어린 딸을 시 어머니에게 맡기고 옛사랑을 찾아 갔다고 주고 받던 말을 들어서 나도 알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어머니에게 양육권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재혼한 상대가 세브란스 의과 대학생이었던 그 분이라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어떤 친척은 말 하기를 의과 대학생이었던그 분도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있었는데 숙부께서 이북으로 가신후 휴전이 되면서 다시는 남한으로 올 수 없게되니까 , 부인과는 이혼하고 숙모께 다시 청혼하였다고 입 맛을 쩝쩝 다셨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쟁은 이렇게 수 많은 사람들의 흘러 가던 인생의 물 줄기를 바꾸어 놓았었다 .

세월이 흘러서, 만약 나에게 숙모와 함께 하루를 보내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이 이야기를 쓰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보스턴 근처에서 살던 때니까 20여년 전 가을이었나 보다.

White Birch라고 부르는 자작나무 숲을 슆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보스톤 근처 뉴 잉글랜드 지방이다.

가을이면 자작나무의 황갈색 잎이 떨어져 하얀 그루터기 밑동에 쌓이고,어쩌다 부는 바람이 마른잎을 날리며 내는 버석거리는 소리에서, 그 곳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가 탄생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숙모님과 나는 자작나무 숲을 거닐기도 하고 들판에서 계절의 마지막을 피우고 있는 들꽃을 한 아름씩 꺽으며 Dry Flower는 꽃을 거꾸로 걸어 놓고 말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주고 받았다.

사실 우리의 사이가 이야기의 공통점을 찾기가 힘든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친구를 만난 것 처럼 끊임없이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러다 무슨 생각에서 였는지 불쑥 숙모님이 숙부님 이야기를 꺼내셨다.

이산 가족을 찾아 주는 TV방송이 성공한 다음 이북에 있는 친척도 찾아 주는 단체가 생겨서 딸 아이가 아버지 이름을 적어 냈는데 아직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숙모님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환갑 나이의 숙모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셨다.

이런 아내와 어린 딸을 남겨 두고, 먼저 이루어야만 할 숙부님의 꿈은 어떤 꿈이었을까?

"그때 너의 숙부 떠나면서 하는 말이, 약속한다, 꼭 2년만 기다려 주면 돌아 온다, 내 손을 잡고 하도 그러니까 나는 2년만 기다리면 돌아 올줄 알았지."

휴전선이 그어졌어도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후,숙부 친구분이 북한의 간첩이 되어 다시 남으로 넘어오다 잡혀서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는 말을 듣고 집안 어른이 찾아 가서 숙부의 소식을 물어 보았다.

놀랍게도 숙부님은 그새 결혼도 하시고 아이까지 낳아 잘 살고 계신다고 간첩이 말했다고 한다.

" 꼭 돌아 온다고 약속해 놓고, 그새 아이까지 낳았다는 말에 내 가슴이 얼마나 허망한지, 그 소식 듣고 나서 나도 결혼했지야."

이럴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를 나는 지금도 잘 모른다. 우리는 집으로 가기위해 자작나무가 하얗게 줄 지어 있는 숲길로 들어갔다.

발에 밟히는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말 없이 걷는 우리의 뒤를 따라 오고 있었다.

보스톤 비행장에서 숙모는 어제 꺾은 들꽃을 손에 들고 나를 돌아 보며 들어 가셨다.

나도 손을 흔들며, 얼굴도 생각 나지않는 숙부님이지만 분명히 약속을 지키지 못할 어떤 피치못할 사연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숙모님도 그렇게 생각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손을 흔들며 속으로 말했다.

전쟁이 가져다 준 생이별은 남과 북으로 갈라 놓은 두분의 삶 속에서 어떤 무늬의 흔적을 남겨 놓았을까?

지금까지도 적십자에서는 숙부님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찌감치 숙청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는 숙모님이 선물로 가져 오신 카세트 테입, 그당시에 유행한다는 조 용필 테입이 돌아가고 있었다.

"사랑했던 마음도, 기다리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

스쳐버린 그 약속, 잊어야할 그 약속, 허공 속에 묻힐 그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