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프론티어

여행을 할 때 생기는 보너스는 우연히 만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한국의 다도해를 둘러 보려고 남편과 통영에 들렸을 때의 이야기다.

버스를 타고 통영에서 내린 다음, 배를 타야 하는데, 마침 관광 안내소라는 간판을 걸어 놓은 작은 건물이 보이기에 문을 두드리자, 매표소 같은 창문으로 시골 아주머니 한 분이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가 가고 싶은 섬 이야기를 하면서 도움을 청하자, 택시 회사로 전화를 하더니만 10분 정도 기다려야 온다고 하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미국 에서 왔다고 하니까 문을 열고 나오면서 미국에서 사는< 이 아무개>를 아느냐고 반갑게 묻는다.

그 사람이 미국 가서 성공했다고 통영에서는 소문이 났는데 아느냐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남편은 웃으며 자리를 피해 버리고, 혼자 남은 나도, 순진한 시골 아주머니의 질문에 똑 부러지게 모른다고, 미국이 얼마나 넓은 줄 아느냐고는 대답 할 수가 없어서 나는 가정 주부라서 그렇게 크게 성공한 사람은 잘 모른다고 하자, 미국에서는 여자들이 다 돈 번다카던데--하면서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위 아래로 훑어 본다.

주책없이 내뱉는 말 속에서도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고 막 쳐들어 오는 기술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아마도 어수룩한 순진함이 경계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를 나에게 보낸 것 같다.

택시를 기다리는 10분 사이에 나는 그녀의 일생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녀의 남편은 젊었을 때는 배를 가지고 어업을 했으나 지금은 딴 여자가 생겨서 자기하고는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사실 관광 안내소 일도 남편의 일인데 남편이 볼 일이 있으면 자기가 나와 있는다고 한다.

다른 여자하고 사는 남편이 뭐가 이쁘다고 일까지 도와 주느냐고 물었더니, 남편은 남자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처음에는 그녀의 말귀를 못알아 들어서 남편 구실 잘하고 사는 남편이 이세상에 몇이나 된답니까하며 맞장구를 쳐 주었더니, 그기 아이라 우리 영감은 나하고 살 때부터 서도 사내구실을 못 했다카이, 그 놈의 술때문이지--지금도 한잔하고 있을끼라.

이쯤에서 나에게는 혼돈이 왔다.

혹시 이 여자가 정신병자가 아닌가, 처음 보는 나에게 자기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목소리도 명랑하게,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으로 아주머니를 자세히 쳐다 보았다.

50은 훨씬 넘었을 것 같은 촌 아주머니였다.문학과 예술의 고장 통영에서 살면서도, 문학과 예술의 그림자를 한번도 밟아 본 것 같지않은 원초적인 냄새가 났다.

지금 이 여자는 골치거리 남편, 이 여자의 표현대로라면, 알콜 중독에 사내구실도 못하는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넘겨 버린 것이 홀가분해서 이렇게 마음 편하게 얘기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라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기보호 시스템의 퓨즈가 인생의 굴곡마다 하나씩 꺼져나가서, 이제는 어떤 공격에도 다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는 무 반응 상태가 되어있는 것인지, 그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내 눈에는 그녀가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여행 할 때마다 남편과 싸우는 나의 모습이 그녀의 얼굴과 겹쳐지면서 머쓱한 기분이 솟아났다.

통영에 올 때까지 버스 속에서 남편과 나는 말도 하지 않고 서로 다른 쪽 창 밖을 내다 보며 왔다.

부산에서 길을 몰라서 헤매일 때 마침 지나가는 경찰이 있기에 내가 물어 보았더니, 남편을 믿지 못하고 경찰에게 묻는다고 화를 내는 남편에게 밴댕이 속같다고 나도 화가 났던 것이다.

바보같기도 하고 도사같기도한 그녀는 쉬지 않고 자기 일상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저-기 지금 걸어 오는 사람이 자기 남편이라고 턱을 들어 가리킨다.

왜소한 중 늙은이가 보였다.

구부정한 허리에 찡그린 표정이 멀리서 보아도 아주머니하고는 정 반대의 기질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참 어울리지 않는 부부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아주머니를 쳐다 보았다. 맑고 선한 눈매가 정신 병자 같지는 않았다.

주어진 삶을 그냥 열심히 살아가는, 그래서 현대인의 눈에는 조금 이상하게 보일 뿐인 원초적인 여자.

다도해는 이름 그대로 섬과 섬 사이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기암 절벽에다가 파도는 몸으로 뒹굴어 구멍을 뚫어 놓기도 하였고 으르릉 파고 들어가서 깊이 숨 쉴 곳을 마련해 놓기도 하였다.

어쩌면 그 여자는 다도해의 파도를 보면서 원초성을 길러냈을 것이라고 배를 타고 섬 사이를 지나는 동안 나는 내내 생각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문학적으로 표현한 이 고장의 시인 청마, 유치환의 시는

외우지 못해도, 바다와 땅의 경계를 넘나들며 파도같이 말하는 여자.

"님은 물같이 까딱도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나는 그 여자에게서 다도해의 파도처럼 살아가는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배웠다.

그래서 충무를 떠나는 버스 안에서 남편과 충무김밥을 손으로 집어 먹으며 같은 쪽 유리창에 비취는 남해 바다를 보며 떠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