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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민권자가 되고 나면 국민의 의무 중의 하나가 배심원 의무이다.

나도 시민권자가 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배심원으로 섬겨야 한다는 통지서를 몇 차례나 받아왔다.

그 때마다 영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서 혹시 정상참작이나 진실에서 벗어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이유를 대곤 하였었다.

그런데 이 번에는 일방적으로 법원으로 나오라는 스케줄이 잡혀 편지가 날라왔다.

만약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상당한 벌금이 부과될 것이라는 경고도 함께 왔다.

일단 나와서 나의 입장을 판사에게 설명하면 예외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시골에만 살던 사람이 처음 도시에 와서 어리둥절한 사람처럼 파킹 절차부터 물으며 법원에 찾아갔다.

미국 시민권자로서 행할 수 있는 법적 의무이기도 하지만 또한 법적 권리라서 일까?

많은 시민권자에게 동등하게 기회를 주기 위한 배려라서 일까?

12명의 배심원이 필요한데 80여명의 대상자들을 오라고 한 것이었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소지품 검사를 마치고 숨소리도 죽여야 하는 대기실에서 약 2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재판실로 옮겨진 후에 한 사건에 배심원으로 봉사할 경우 적어도 10일 동안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걸린다는 안내가 있었다.

그래서 배심원으로 섬길 수 없는 사람들은 줄에 서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서 판사에게 하루 이틀은 배심원으로 섬길 수 있어도 그렇게 많은 날 동안 직장을 비울 수 없다고 나의 입장을 진솔하게 말하였다.

그래서 예외를 받게 되었다.

배심원 일로 일상에서 약간 벗어났던 긴장의 하루를 마감하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신선한 산소를 들이마시는 순간 느끼한 식사 후에 먹는 새콤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것 같았다.

이 공원이 인공적인 보살핌도 있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졌을 터인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각 가지 나무들이 병풍처럼 울타릴 치고있다.

그 울타리 안에 축구 장 몇 개를 만들어도 될 만큼 푸른 잔디가 눈 부시게 펼쳐져 있다.

그 잔디 위에 놓치기라도 할 세라.

해가 지기 전에 나무들이 밤에 자신의 누울 자릴 그림자로 길게 표시해 놓고 있다.

공원의 중앙에 자리한 호수는 언제 보아도 운치와 자태가 여전하다.

빈 의자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있노라면 무수한 물결이 '평온'이라는 한 단어로 묶여져 동그랗게, 동그랗게 다가온다.

초저녁엔 달이 막 낮잠에서 일어난 듯 부스스해 보인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세수하고 화장한 여인의 얼굴처럼 윤곽이 드러난다.

더욱 몇 일 전에는 구부러진 솔잎 같더니 젖 살 오르는 어린 아기처럼 살이 올라 오늘은 속이 가득한 송편처럼 볼 뚝해져 있다.

둥그렇게 나있는 길을 따라 걸어가면은 그 달이 공원을 사수라도 할 듯이 서있는 각 가지 나무들 사이로 우리들과 숨바꼭질을 한다.

이리 숨었다가 저리 숨었다가 하며 자기기 술래에 일가견이 있는 듯 자신 있게 계속한다.

남편과 내가 이 공원을 찾아온 처음에는 걷는 것이 아니라 말 그 대로 산책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걷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 곳에 오랜 세월을 살면서도 자연적으로 주어진 환경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 여름엔 이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곳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회를 만들고 있다.

반대 쪽에서 걸어오는 사람들 중에 꽤 낯 익은 얼굴들이 있다.

규칙적으로 운동 삼아 저녁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눈 인사를 하며 가벼운 미소를 띄운다.

산책을 하는 사람들마다 특색이 있다.

이 곳에 와서도 습관적으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 아이팓을 들으며 노래하는 사람. 고개를 떨구고 깊은 상념에 빠진 사람, 마네킹처럼 무표정한 사람, 자신보다 개에 이끌려 가는 사람, 숨을 헉헉 대며 산 달이 찬 듯 배가 부른 사람, 직장 옷을 입은 사람, 보조대에 의지하여 힘겹게 걷는 사람, 좌우에 무관하고 앞만 보고 경주마처럼 거의 뛰어가는 사람. 데이트를 나온 사람 등 다양하다.

늘 남편과 산책을 하다 오늘은 막내 딸과 함께 걷게 되었다. 지난 몇 일 동안 인터넷 끊어졌다. 인터넷이 없어서 살수가 없다는 것은 좀 과장일지 모르지만 불편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 편리함이란 이름아래 우리의 삶이 다스림을 받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았다.

실은, 우리가 다스리고 관리하는 권리를 포기하였다. 오히려 다스림을 받는 것이 의무처럼 되어버렸다.

현재보다 우리 아이들의 세대에 인터넷이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염려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인터넷과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고 크신 분이다!

막내 아이가 인터넷이 되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산책을 하지 않겠느냐고 별로 기대하지 않고 물었다.

예상 밖으로 운동화를 신고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너무 빨리 걷는다고 투정이었다.

그래서 좀 속도를 늦추었다.

인터넷이 되지 않아서의 불편함은 있었지만 딸과 함께 산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평상시에 상상할 수도 없는 시간을 보너스로 받은 것이다.

머지않아 편입해 가는 아이와 이야기 하라고 남편은 일부로 몇 발자국 뒤에서 걸어와 주었다.

아이가 자신의 주변이야기, 친구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꺼내었다.

80살 된 어머니가 60살 된 아들에게 길 건널 떼 '차조심'하라는 말이 있듯 막내라서 늘 어린아이로만 생각했는데 많이 성숙해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터넷의 지배를 받는 줄만 알았는데 자기 정체성이, 가치관이 뚜렷하였다.

푸드득! 푸드득! 호수 주위의 잔디 위에 앉아 있던 오리들이 5, 6씩 떼를 지어 날아간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또 여러 마리 오리 떼들이 같은 방식으로 날아간다.

아마도 가족들 단위로 안식할 곳을 향하여 날라가는 것 같다.

'주신 하루에 감사 드린다!'며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