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프론티어

춤바람이라는 것이 있었다. 매우 오래 전의 이야기다.

이 바람은 처음에는 매우 미약한 바람으로 시작 되었으나, 태풍이 이동하면서 세력을 키워가듯, 한국 가정 부인들의 한과 끼를 흡수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태풍으로 그 세력을 키우며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비밀 덴스홀이 생기기 전에, 정 비석씨의 <자유부인>이란 소설이 쓰여지기도 전에, 나는 일곱살의 나이로 이 태풍이 지나 가던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625 전쟁이 끝나던 무렵 아버지는 회사일로 다른 지방에 가 계실 때다. 어머니하고 어린 동생들하고만 사는 우리집에 젊은 군인 부부가 세를 들어와 살게 되었다. 군인 장교였던 남편은 몇일씩 집에 들어 오지 않는 날이 많았고, 아이가 없는 젊은 새댁은 심심하면 나를 자기 방에 불러다 놓고 미제 비스킷이며 쵸코렛같은 간식을 나눠 먹으며 놀아 주기도 해서 나는 그 여자가 제일 예쁜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새댁이 건너와서 남편과 사교춤을 추려고 하는데 우리집 축음기를 좀 빌려 달라고했다.

그 시절, 빅터 레코드사의 축음기는, 개 한마리가 나팔관 옆에서 소리를 듣고 앉아있는 네모난 나무 상자였다. 레코드를 얹어 놓고,옆에 달린 손잡이로 태엽을 감아야만 레코드가 돌아가고 태엽이 풀리면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멈추어 버려서, 때 맞추어 태엽을 감아 주어야 했는데, 그 작업이 귀찮아서 였던지 젊은 부부는 나에게 태엽 감는 일을 부탁하면서 밀키웨이 쵸코렛 두개를 손에 쥐어 주었다. 나의 첫 아르바이트인 셈이다. 가장 많이 올려 놓은 레코드는 "연 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나알 리더어라"하고 시작되는 불르우스 곡이었다.

그들이 서로 마주 서서 음악에 맞추어 앞으로 가다가 휙 돌아서 뒤로 가고 하던 움직임과 함께 새댁의 통치마가 펴지다가 군인 장교의 카키색 바지 가랭이를 휘 감는 장면이 아직도 나에게는 남아있다.

이 날을 시작으로 그들은 가끔 우리집 축음기를 빌려다가 사교춤이라는 것을 추었고, 얼마 후에는 우리 엄마에게 까지도 "슬로우 슬로우 퀵퀵" 동작을 가르쳐 주며, 주인 아주머니처럼 빨리 배우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칭찬까지 하였다. 물론 그 때도 축음기 옆에서는 내가 태입을 감고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시작 되었는데---, 엄마가 사교덴스를 옆방 장교 부부에게서 배웠다는 말을, 놀러 온 대학생 사촌 오빠에게 말하자 오빠는 사교춤 잘 추는 친구를 데리고 와서 옆방 새댁과 함께 사교춤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장교 남편이 집을 비울 때 주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나중에는 사촌오빠 친구뿐만 아니라 외삼촌 친구들까지 모여 들었다.

전쟁 직후라서 할일 없는 룸펜들이 많을 때였다. 여자들은 주로 새댁이 불러 온 군인 부인들이었다고 나중에 엄마한테서 들었다. 그들과 어울려서 엄마도 춤을 배웠고 나도 축음기를 돌려주며 먹을 간식을 벌었다. 우리집 축음기가 아예 새댁 방에서 살고 있을 때 쯤 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그날, 내가 마당에서 친구들과 고무줄을 하며 놀고있을 때였다.

우리집이 한옥 집이어서 미닫이 문 밖으로 덧문이 붙어 있었는데, 새댁 방 문이 열리면서 장교 아저씨가 덧문을 닫는데 손에는 회초리가 들려있는 것이 보였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회초리를 들고, 겨울도 아니고 그것도 낮에 덧문을 닫는다는 것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잊어버릴 때 쯤, 이상한 신음 소리가 그 방에서 흘러 나왔다가 끊기고, 그리고 그 신음 소리는 오래 계속되었다.

군인 장교 부부가 이사 나가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새댁도 새댁의 옷걸이도 없어진 방에 축음기만 윗목에 놓여 있었다.

새댁의 방에는 장농이 없었다. 군인 가족은 이사를 자주 다니기 때문에 손 수레 한짐으로 이사 다닌다고 하였다. 장농 대신에 앞에 길쭉한 지퍼가 달린, 직 사각형 헝겁 옷 걸이가 미국 사람들이 쓰는 장농이라고 자랑하였는데, 텅 빈 방안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없어진 옷걸이의 빈 자리가 가슴을 쳤다.

내 짐작대로 장교 아저씨는 회초리로 새댁을 때렸다고 한다. 이불로 머리를 덮어 소리가 새어 나가지 못하게하고 때렸다고 한다. 엄마가 새댁 방으로 죽을 쑤어 가지고 들어 가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들어 오지 못하게 하였고,이사 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태풍은 우리집도 쓸고 갔다. 한달에 한번씩 집에 오시는 아버지와 엄마가 그 일로 크게 싸우시는 것을 보았다. 화가 나신 아버지에게 사촌 오빠와 외삼촌이 와서 빌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 뒤로는 무슨 이유에서 였는지 그 방에 세 들어 오는 사람은 없었다. 대청 마루로 내 놓았던 아버지 물품들이 다시 들어가고, 책상 위에 축음기도 놓여 있어 가끔 나하고 동생이 태엽을 돌리며 놀았다. 모든 것이 평온하여 진 것 처럼 보였으나 그 방에 묻어 있는 기억들은 그러지 못했다. 아무리 아버지의 물건들이 놓여 있어도, 나는 그 방에 들어가면 우선 미제 옷걸이가 걸려 있던 자리를 쳐다 보고 코티 분 냄새가 나던 새댁의 예쁜 얼굴을 찾아 본다. 축음기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에 맞추어 스탭 밟는 소리와, 휘 감기던 치마 자락의 열기는, 회초리를 든 장교 아저씨의 모습에서 끊어져 버린다.

나중에 커서 "지킬 박사와 미스터 하이드"라는 소설을 보면서 떠오르는 얼굴은 어이 없게도 기억의 밑바닥에 가라 앉아 있던 장교 아저씨의 얼굴이었다. 선과 악을 함께 가진 두 얼굴의 남자로, 어린 나이였지만 구분해서 기억해 놓았던 모양이었다.

도덕의 기준이 뚜렸하던 시절이 우리에게는 있었다.비록 그 기준이 남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편견이었다 하더라도, 여자들은 가슴속에 한을 품을망정 소리 내지 못하던 것을,

전쟁이 지나면서 서양영화와 함께 불어 온 사교춤 바람이 그 때 까지 쌓아 놓은 도덕의 기준을 단숨에 무너뜨리며 지나 간 것이다.

손 바닥만한 치마로 겨우 엉덩이만 가리고 다니는 요즘 젊은 여자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너희들이 연 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날리던 시절의 멋을 알기나 하느냐,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에서도 봄은 찾아와 춤바람을 일으키고, 그래서 남편에게 회초리로 맞아도 침묵해야 했던 할머니들의 애 간장을 너희가 아느냐, 봄날은 누구에게나 찾아 오지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너희가 아느냐, 봄날은 간다. 애간장을 녹이고 간다. 멋을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