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프론티어

무슨 색을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어 보는 사람을 가끔 만난다. 나는 흰색과 회색 바탕에 놓여진 노란색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첫 눈에 반한 색갈이기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빠리에서 귀국한 화가의 전시회가 열린다고 해서 학교가 끝난후 친구 몇과 함께 찾아 갔다.

(화가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흐린 날이었던지 콘크리트 건물은 음산하게 보였고, 사실 그 무렵 건물들의 모습은 다 그랬다. 문은 잠겨 있었고, 포스터를 보니 전시회는 다음날 부터라고 적혀있어서 실망하며 돌아가려고 하는데 친구 중 하나가 건물 옆 쪽에 붙은 유리창을 들여다 보면서 손짓을 하며 부른다. 그림이 보인다고 하였다.

1960년대의 많은 건물들은 작은 창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아래쪽 유리에는 사람이 들여다 보지 못하도록 종이를 발라 놓은 곳이 많았다. 전시회장 창문에도 종이가 붙어 있었지만, 친구가 찾아 낸 유리창은 귀퉁이가 깨어져서 그 사이로 안이 들여다 보였던 것이다. 돌아가면서 발돋음하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깨진 유리 구멍이 그리 크지가 않아서 눈을 한쪽만 대고 들여다 보았다. 캔버스에 그려진 추상화 한점이 튀어 나왔다. 나는 그때까지 추상화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책에서 손바닥만한 사진으로는 보았어도 그 시절 인쇄 기술이나 종이의 질이 좋지 않아서 추상화가 표현하고자하는 느낌의 충격을 모르고 있었는데, 깨진 유리창에 한쪽 눈만 대고 들여다 본 그림속의 하얀 바탕과, 농도가 다른 회색 무리속에서 화드득 쏫아져 나오는 노란색이 나를 첫 눈에 사로잡아 버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색갈에도 감정이 있고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어떤 색과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그 색갈은 빛이 날 수도 있고 죽어버릴 수도 있는 생명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슆게 말하자면 색갈에도 궁합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노란색이라고 해도 검정색과 만나면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붉은 치마위에 놓이면 춘향이를 생각하게 만든다. 노란 개나리색과 초록은 들판의 봄바람을 느끼게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속에는 노란색을 질투의 색으로 그려 놓기도했다. 남편을 빼았긴 마녀, 메디아는 남편을 빼았아 간 신부에게 노란색 독이 든 드레스를 선물한다. 입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노란색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골격 관절이 뒤틀리면서 서서히 죽어갔다고 했다.

인간은 오래 전 부터 카드뮴이라는 금속에 들어있는 원소를 가지고 노란색을 만들어서 물감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카드뮴이라는 금속 원소에는 독이 들어 있어서 폐광에서 흘러 나온 카드뮴에 오염된 물을 마시고 지역 주민들이 신화 속의 신부와 똑같은 증세로 죽어가는 사건이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기도 한 것을 보면 신화가 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첫눈에 반한 노란색이 바로 카드뮴 옐로, 노란색이었다. 색갈을 알고싶어하는 마음과 함께 미술대학을 가야겠다는 마음이 확실 해졌다. 그리고는 미술학원에 등록을했다. 학원에는 남녀 고등학생들이 한방에서 함께 석고상을 그리면서도 말을 섞거나 놀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남학생 여학생이 쉽게 친구가 되는 시절이 아니었으니까.

기억나는 사건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되었다는 뉴스가 있던날 그 학원에서 잡다한 일을 하면서 가끔은 새로 들어온 초짜에게 그림을 가르키는 일도 하는 노총각 조수가 흥분해서 하는 말이, 이제 자기는 꼭 미국으로 건너 가서 잭키에게 청혼을 하겠다고 떠들다가 선생님이 아직은 그런 말 할 때가 아니라고 진정시키자 남학생들이 와그르르 웃고 여학생들은 듣고 있으면서도 못 들은척 웃지도 않고 석고상을 그리고만 있던 일이 생각 난다.

그 중에 한 남학생이 지금은 한국의 유명한 화가가 되어 있는 오 수환 화백이다.

2년을 우리는 같은 학원을 다니면서도 단 한번도 서로 아는척 해 본 적은 없다.

고3때는 입학시험이 가까워져서 두 사람만 남아서 밤 늦게까지 시험 준비를 하는 날이 많아 졌어도 그 쪽은 쳐다 보지도 않고, 간다 온다 말도없이, 대개는 내가 먼저 집으로 가고는 했다.

그 때의 그 남학생을 표현하자면 아무 색갈도 섞이지 않은 무채색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의 오 수환 화백의 그림에서도, 검정색이나 회색 흰색의 무채색이 아주 간결하게 어울어져 있는 것을 보면, 느낌도 사람을 아는데 중요한 역활을 한다고 믿게된다. 근래에 와서 색갈은 심리학과 접목하여 정신치료와 같은 큰 일도하고, 소비자의 눈을 광고 속에서 이용하여 돈을 버는데 쓰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색갈은 우리의 삶 속에서 동거 동락하며 살고있다. 흔히 보던 노랑색이 흰색과 회색을 만나면서 새로운 카드뮴 노랑색이되었던 그때, 나에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잠재의식을 깨워준 50년 전에 그랬듯이, 또 다른 색갈의 어울림이 새롭게 찾아와서 다시 나의 가슴을 깨워 주기도 하고 어루 만져 주기도하면서, 함께 살아갈 것이다.

내가 이렇게 확신하는 것은 색갈이 빛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