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프론티어

세씨봉 시절의 통기타 가수들이 모여서 6-70년대를 추억하고 노래 부르는 TV 프로그램 DVD를, 친구가 우편으로 보내 주었다. 정말 재미있게 보았다. 그리고 그때는 나도 젊은 아가씨였다는 것을 기억 해 내었다. 그 시절, 나는 대학생이었고,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기분이 좀 그런 밤이면 하숙방 언니와 함께, 학교 앞 < 빠리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마냥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그리고는 또 밤 12시부터 시작하는 FM방송 '한밤의 음악 편지'를 듣고 나서야 잠을 자고는 했다. 가끔 음악 편지를 하숙방 언니와 함께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언제 공부를 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둘이서 밤새 이야기 하던 생각만 난다.

신촌 버스 정거장에서부터 이화여대 정문 사이에는 다방이 세개 있었다. 그 중에서 <빠리 다방>은 자칭 예술가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세계의 모든 음악이 그 곳에서 흘렀다.

이화여대 정문으로 들어 가는 다리 왼쪽 이층에 있었는데 낮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서 교문 수위실 높이 보다 낮게 보였다. 교문이 있는 다리를 지나 다니면서 빠리다방이라는 글자가 보이면, 나도 모르게 '미라보 다리'라는 시가 떠 올랐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 내린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아로새기리, 기쁨은 언제나 괴로움에 이어온다고,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무른다"

그때 나는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는 귀절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월이 가도 나는 늙지 않는다는 뜻 쯤으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언젠가 어린 손녀가 나에게 자랑을 하면서 20까지 숫자를 셀 수 있는데 할머니는 몇살이냐고 손가락을 펴면서 물었다.손녀딸이 셀 수 없는 숫자의 세월이 나를 지나쳐 갔다고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하는지, 나도 내 나이에 놀라면서 당황해 한 적이 있다. 세월도 갔고 나의 젊음도 저만큼 물러나 있었다.

"어쩌면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한가, 희망이란 왜 이리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무른다" 다리를 건너면서, 빠리다방이라는 간판만 보고도 미라보 다리를 꿈 꿀 수 있었던 나의 젊음은, 가정 주부라는 개미 챗바퀴같은 생활 속에서 매일 매일 죽어 갔다. 그래서 어느날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가 뜻하는 바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마 그 무렵쯤에 나는 예수님을 만났던 것 같다.

빠리다방의 매력은 신촌역을 떠나는 기차 소리에도 있었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오르내리는 나무 계단에도, 넉넉한 웃음 만큼 넉넉한 몸집에 빵떡 모자를 쓴 마담에게서도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살아 있는지)

몇번 다니다 보면 저 자리에는 누가 앉는지 뻔한 고정 손님들이 대부분으로, 돈 버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다방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에도 매력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 곳에서도 흘러갔던지, 오랫만에 학교 앞을 다시 찾았을 때는 빠리다방이 있던 자리에 현대식 건물이 서 있었고 하숙집으로 들어가는 골목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학교 수위실도 새롭게 지어져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미라보 다리라는 시 구절은 저절로 생각이 났다. 세월은 가도 나는 머물렀을까?

나는 빠리다방 뒷 골목길에 있는 과부 아주머니 하숙집에서 대학교 2학년을 시작했다. 그 하숙집에는 여대생 열명이 하숙하고 있었다. 다닥 다닥 붙은 방 다섯개에 둘씩 들어가 살았는데, 책상 두개 놓고 이불 두개 펴면 딱 맞아 들어가는 크기였다. 앞집에는 모두 남학생만 사는 하숙집이어서 가끔 종이 비행기가 날라오고 아침에 마당에서 세수 할 때면 나무 담장 위로 고개가 삐끔 거릴 때도 있었지만 과부 아주머니가 다 알아서 처리 해 주었다.

여자 대학생 10명이 있으니 심심치 않게 연애 사건이 터지기도 하였는데, 하루는 대문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나서 내다 보니, 우리 하숙집에서 데이트박사라는 별명이 붙은 아이를, 대학생 같아 보이는 남자가 이뺨 저뺨을 때리고 있었다. 말을 들어 보니 한꺼번에 두 남자와 연애를 한 것이 들통 났던 것 같았다. 또 기억에 남은 사건은 술 취한 대학생이 맥주병을 깨어 쥐고 대문을 두드리며 누구 가시네 나와라. 네가 도도하면 얼마나 도도해서 나를 바람 맞히냐 고래 고래 소리 지르는 것을 과부 아주머니가 담 넘어로, 남자 하숙생들의 도움을 청해서 겨우 달래 보낸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같은 기적은 10명의 여대생이 화장실 하나인 하숙집에서 별 불편 없이 조용히 살았다는 점이다. 다만 반찬이 식물성으로만 며칠을 계속해서 나올 때만 조금 배짱이 있는 학생이 "우리가 토낍니까, 와 이래 풀만 멕인데요"하고 소리치면 그 다음날에는 불고기도 올라 오고 했다. 하숙비를 얼마를 냈는지는 기억에 없는데, 데이트를 나가면 500원이 있어야 했던 기억은 난다. 버스를 타고, 점심은 자장면을 먹는다 해도 영화 보고 저녁 먹고, 만날 때와 헤어질 때 두번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면, 둘이서 500원 정도씩은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때 우리는 젊은 아가씨였고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 풀의 꽃처럼 그 영광이 떨어져 간다는 것을 몰랐다.

"날은 흐르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네 사랑은 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로 세느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무른다"

세시봉 시절의 가수들이 통기타를 치며 노래 부를 때 나는 알았다.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무른다는 뜻을 알게 되었다. 나를 만드신 이도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나의 나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은혜의 강물 속에서 나는 머무를 수 있다고, 밤이 오고 종이 울려도 두렵지 않다고 나는 나에게 말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