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프론티어

세살 먹은 손녀 딸이 나에게 말했다.

“할머니, You are my B.F”옆에 있던 며느리에게 BF가 뭐냐고 물었더니 Best Friend를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손녀 딸과 할머니도 BF가 될 수 있구나 기쁘게 생각하며, 나의 어린시절 BF였던 경애를 떠올렸다. 경애와 나는 학교가는 버스 정거장에서 처음 만났다. 둘다 숫기가 없어서 같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같은 학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얼마 동안은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누가 먼저 어떻게 친구하자는 말을 걸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성질이 급한 경애가 먼저 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버스 정거장에도 항상 경애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경애가 버스 정거장 근처 고모집에서 하숙하고 있으며 친가는 밀양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름 방학이 되면 나도 밀양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우리집에서도 경애는 딸이 었고 밀양 경애집에서도나를 딸로 생각했다. 내가 미술대학을 간다고 하자 경애도 같은 미술대학에 지원해서 4년을 또같이 지냈다.

그렇게 오랜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우리가 싸운 적은 없다. 우리는 무엇이든 나눠 먹고, 같이 다니면서 죽을 때까지 BF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결혼은 내가 먼저하고 미국으로 왔다. 경애도 의사와 결혼을 해서 5년뒤에 미국으로 왔다.

그러나 미국은 넓었고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결혼 생활은 나혼자 살아가기에도 바쁘고 벅차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경애의 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다.

오랫동안 나는 경애를 잊어 버리고 살았다. 그리고 어느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경애가 시집간다고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내가 엉엉 우는 꿈이었다. 하도 울어서 꿈에서 깨어났을 때도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잊고 있던 경애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했다.

다행히 전화번호는 그대로 였다. 우리는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오랜 만에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경애는 결혼생활이 쉽지 않고 힘들다고 했다. 아마 그래서 그런 꿈을 꾸었나 보다고 했다.

그러나 그 주말에 경애는 커다란 교통 사고를 당했다. 남편과 함께 타고가는 차가 프리웨이 반대편에서 오던차와 부디쳤다고 했다. 남편은 가볍게 다치고 경애는 내장 파열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병원에서 정신이들자 처음 떠오르는 생각이 내가 꾼꿈이었다고 말했다.

그후 경애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한국에서 였다. 그때 경애는 남편의 직장을 따라 한국으로 이사가서 살고있었다. 목련꽃이 막피어 나던 1999년4월 한달을 나는 경애와 함께 여행도하고 동네 자장면도 사먹으면서 옛날학교 다니던 시절의 BF가 되어지냈다. 그때는 호암미술관이 용인에 있을 때라 미술관에 가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며 우리 젊은 시절의 취미가 변하지않은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그렇게 급하던 경애의 성격이 느슨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만나보지 못하고 지낸 2-30년동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모든 일에 도를 통한 사람처럼 서두르거나 불평을 하지 않았다.

누가 무슨 불평을 얘기하면 그까짓 일이 무슨 큰일 이냐고 하였고 다른 이야기는 다 털어 놓으면서도 남편의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경애 어머니 말씀은, 힘든 시집살이 하다가 미국에 가서는 남편의 성격에 눌려 지내다 보니저렇게 변했나 보다고 나에게 푸념하셨지만 막상 본인의 입에서는 불평한마디 나오지 않았다. 내가 가슴 아파했던 점은 경애의 웃는 모습이었다. 밖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이 아니고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웃음을 웃었다. 진정한 웃음을 잃어 버린 경애의 마음을 나는 그때 읽을 줄을 몰랐다. 오랜 만에 한국에 가서 옛날 친구와 젊은 시절로 돌아가 있다는 기분에 취해있었다. 경애의 마음을 열고 엉켜있는 실타래를 풀어볼 생각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미숙 했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한달이 조금 지날 무렵 한국에 있는 사촌동생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신문에 강도사건으로 사람이 죽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나이와 이름과 동네가 경애언니와 비슷하니 좀더 자세히알아 보라고 하였다. 신문기사는 사실이었다. 새벽녘에 강도가 들어와서 자고 있던 경애와 경애 남편을 칼로 찔렀는데 경애는 한번 찔렸으나 다리의 대동맥을 다쳐서 피를 많이 흘려 죽었고, 남편은 발을 여러번 찔렸으나 가벼운상처로 별문제가 없어곧 퇴원하게될 것 같다고 하였다. 이 기가 막히는 소식에 나는 경애 남편을 제일 먼저 의심했다. 경애남편은 의사다 어디가 급소인지 알것이고 자기에게는 걷기에 지장없이 상처를 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내가 한국에 나가서 경애 남편을 만났을 때 솔직하게 그일을 물어보았다. 의사가 왜 응급 치료를 하지 않았는지, 119는 왜 부르지 않았는지, 내가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에게서 대답을 직접 듣고 싶다고 물었다. 그는 울먹거렸다. 그리고 너무도 미숙하게 마치 어린 아이가 나쁜 짓을 하다가 어머니에게 들킨 것처럼 더듬거리며 서툴게 얘기했다.

미국에서 오래살다보니 911을 눌렀는지 기억에 없지만 전화가 되지 않아밖으로 나가서 도움을 청하려고 기어나가다가 신문배달을 만났고 그 뒤로는 기억에 없다고 하였다. 경찰서 형사들에게 거짓말 탐지기로도 조사를 받았다고 하였다.

나는 이제 더이상 경애 남편을 의심하지않는다. 그가 만약 정말 살인범이었다면 더 그럴듯한 변명을 준비했을것이다. 그리고 경애가 왜 남편에 대해서는 한마디 불평도 할 수 없었는지 알것 같았다. 어른의 몸을 가지고 어눌한 어린 아이로 살고있는, 그러면서도 의사의 직업을 감당하는 남편을 그녀는 이해 할 수도, 떠날 수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인간의 명은 정해져 있어서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어야 하는 경애의 명을 내가 꿈속에서 너무 슬프게 우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달이라는 시간을 선물로 주신 것은 아니었는지, 경애야, 너는아직도나의 BF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