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열지 않도록 되어 있는지 창틀에 녹이 짙게 슬어있다. 10시간 정도 타고가야 하는 버스인데 왜 창을 열지 못하게 하였을까?
나무가지들이 창가를 세차게 핥을 때에야 그 답을 찾았다. 나무가 우거진 산에 처음 길을 낼 때는 절단되었던 가지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자랐는데 그 많은 나무 가지들을 제거해 낼 상황이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버스창을 열지 못하도록 고정시켜 놓았던 것이다.
이 로선은 탄자니아 무완자에서 르완다에 이르는 산길이다. 산을 넘어 국경에 이르는 비포장 길에 하루에 한 번만 지나는 유일한 교통편이라 이 버스는 승객 뿐 아니라 상업과 생업의 운반수단이다.
온갖 곡물이 버스 트렁크가 모자라서 버스 안 통로에도 싣고 버스 천장 위엔 닭들이 퍼득리고 깃털을 날린다. 산간의 농부들, 화전민들, 아이를 업은 여인들이 곡물들 사이 사이로 짐짝처럼 빽빽이 승차하여서 앉아 있는 우리들의 어깨를 짖누른다.
식수도 구하기 힘든 저들의 형편에 샤워라는 생각 자체가 사치스럽지 않은가! 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체취가 공기순환이 없는 공간에 숨이 막힐 것 같다.
아이를 업은 여인들을 보며 일어나서 양보해야 하는데……!!! 도덕, 윤리의 눈을 감았다.
변명이랄까….아이을 안아주다 소변세례를 받은 일도 생각났다. 또한 두 달여 가까이를 7도시를 돌면서 주 5일 강의하고 토요일에 버스로 도시를 옮기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때로는 두 번의 설교와 중고등학교 방문 연설과 어린이 사역 등으로 시간의 곡예를타는 듯 했다.
오늘 아침에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배를 타고 14시간의 여정에 오른 것이다. 특히 이 번에는 비행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선택이 있었지만 육로에 비해 10배 이상되는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다.
선교사의 삶은 그렇다! 주어진 재정을 더 나누어주고 베푸는 일에 우선하기 위해 불편한 쪽을 택한다.
버스가 오버 힡(Over Heat) 하면 흙탕물일 망정 계속 부으며 달리는 것이다. 버스 정거장에 멈출 때 마다 살기 위해 몸무림치는 살벌한 현장을 보게 된다. 막대기 사탕, 땅콩 한 봉지, 옥수수, 빵, 음료수 한 병이라도 더 팔기 위한 마켓 전쟁터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환경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현장이다. 길 바닥엔 소나기 내렸는지 황토길이 온통 주황색 페인트를 부어놓은 듯 하다. 그 물을 노오란 물통에 담는 이들도 있다. 어디에 쓰려는지는 모르는 편이 낫다.
“하나님! 비포장도로에 장시간 달리는 것도 쉽지 않는데 숨쉬기 어려운 이러한 상황들을 아시고 계시지요?
“ 기도가 아닌…. 이렇게 푸념하는 동안 예수님이 누이셨던 곳이 떠 올랐다. 당신이 만드신 땅, 가장 잘 정돈된 곳에 당당하게 오셨어야 했는데….. 마굿간!!! 오물 찌꺼기와 냄새, 왕 파리, 개미, 빈대, 모기들이 우글거리는 곳!!! 순간…나의 생각을 조명했다.
KBBA학생들에게 말씀을 강의하면서 아무리 지적인 지경을 풍성하게 확장시켜도 삶의 적용이 없으면 교활한 바리새인과 같이 된다라고 열강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까? 전하기만하고 나 역시 나의 삶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내가 누워서 침뱉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가지 기적 중에 베데스다 못에 있단 38년 된 중풍병자를 주목하셨던 것이 떠올랐다.
그에게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여쭈셨다. 그 때 그는 “네, 그렇습니다.” 하지 않고,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물속에 들어 갑니다.” (요5:7)했다.
얼마나 낫고 싶었을까! 자신의 형편이 얼마나 서러웠을까! 예수님은 그런 그가 낫고자 하는 마음을 알지 못하셔서 물으신 것이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 고백하게 하셨다. 선포하게 하셨다!
그 때 주님은, “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다. “일아나라!”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라고 하셨을까?
옆에 있는 남편에 물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당신 어떻게 생각하냐고. “다시 누었던 자리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 아닐까..”라고 했다.
나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가 소원하는 대로 오랜 중풍병이 고침받아도 생각하는대로 살아지지 않을 때도 있을 수 있다. 오히려 누워서 섬김만을 받던 그런 생활이 그리워질 때도 있을 것이다. 억압과 눌림으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로 살던 애굽을 다시 그리워했듯이 말이다.
이 말씀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다가왔다.
첫째는, 선교사로 내 스스로 담담하게, 당당하게 선포하고 나갔는데 크고 작은 코너에 다다를 때마다 여러 생각이 밀려온다.
그럴 때마다 주님의 부르심을 벗어나려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고 나아가라는 말씀이다.
둘째는, KBBA의 학생들에 대한 것이다. 여러 신학생들보면 지적인 수준이 형편없는 사람이 있다. 제대로 읽지도, 쓰지지 못하는 학생들 말이다.
이런 학생들을 보면서 앞으로는KBBA 신입생들을 위한 Placement Test 를 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모든 학과를 수료했다 하더리도 졸업시험을 치르게 해야 하는 일. 신학교 내규규정 등. 열 두 학교 중 일곱 학교를 돌아보변서 종합적으로 파악해 보았다.
이런 생각을 대표이신 김평육 선교사님께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KBBA 는 무지한 자를 불러 지혜롭게 하며 소외된 자들을 세우는 것이 KBBA의 본질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 공생애의 핵심 아닌가! 그렇다! 나는 세상적 학문의 잣대로 지혜자와 무지한 자를 차등하려 했다. 진보 된 문화와 지식의 줄자란 고정관념을 그대로 적용하려 했다.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란 말씀은 내가 그동안 쌓아 놓고 있던 신앙철학, 인생경험, 학문체험 등을 치우라는 말씀이다.
자기부인(self-denial)이 제자의 첫 째 조건이 아닌가!!!( 눅 9:23)
동족의 피가 하수를 이루었던 전쟁과 가난의 누더기를 입고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에게, 안정된 곳에서 모든 혜택을 받은 이들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보려 했던 내 생각을 옮겨야 하는 것이다.
르완다나 우간다 도시에서는 월드미션 프론티어에서 세운 학교에서 공부하지만 아직도 시골은 창고와 같은 곳에서 창문과, 전기도 없이 공부한다. 양철로 된 지붕에 비가 세차게 내리면 그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강의도 멈추었다 진행해야 한다.
주 5일 내내 단 벌의 옷을 입고 디스크 탈골로 등에 식은 땀이 흠벅 젖은 목회자, 2살 반인데도 영양실조로 걷지를 못하는 딸을 업고 공부하는 목회자,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듣기는 목회자, 시력이 약해서 성경을 못 읽는 목회자, 교통비가 없어 2, 3시간 걸어, 걸어 온 목회자, 작년까지 선교회에서 숙식비를 보조했지만 선교금 지원이 떨어지면서 점심값도 지불할 능력이 없어 굶는 목회자 등 등.
언제 다시 올거냐고….. 엄마를 보채는 아이처럼 바라보던 그 들의 큰 눈망울이 어른거린다.
주님! 제가 안주했던 침상보다 이런 이들을 예수님의 가슴으로 포근히 감싸 안을 수 있는 긍휼의 담요를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