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부룬디 왕국(프랑스어: Royaume du Burundi루아욤 뒤 부룬디[*])이었으나1966년에군주제가 폐지됨에 따라부룬디 공화국(룬디어: Republika y'Uburundi레부블리카 유부룬디)이 되었고,1992년헌법 개정 때 룬디어 국명의 철자가 약간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이 지역의 최초의 거주자는 피그미족인트와족이다. 그들은 반투족의 이주 도중에반투민족에 대부분 대체되고 흡수되었다.
부룬디는 16세기부터 독립 왕국으로 존재하였다. 1903년 부룬디는 독일 식민지가 되었고제1차 세계 대전중 벨기에에 넘어갔다. 부룬디는 1923년 벨기에에 의한 국제연맹의 루안다-우룬디 위임 통치령의 일부였고, 이후에는제2차 세계 대전뒤 벨기에 행정부에 의한 유엔 신탁통치를 받았다. 부룬디 군주제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왕조의 창시자인 은타 레 루샤치가 17세기에 르완다로부터 부룬디에 왔다고 한다. 따른 보다 믿을 만한 출처에 따르면, 은타레는 동남쪽의 부하로부터 왔고 은코마 지역에 그의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1966년 군주제의 몰락 때까지, 왕정은 부룬디를 그 과거와 연결해주는 마지막 연결 고리로 남아 있었다.
1962년의 독립 때부터 1993년의 선거까지, 부룬디는 연이은 군부 독재자들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그들 모두는 소수민족인투치족이었다. 이 기간 동안 1964년과 1980년대 후반의 주요 분쟁, 그리고 1972년의 부룬디 인종 청소를 포함한 광범위한 인종 폭력이 있었다. 1993년 부룬디는 최 초의 민주 선거를 치렀는데, 여기서 후투족 중심의 부룬디 민주 전선(FRODEBU)가 승리하였다. FRODEBU의 지도자 멜콰이어 은다다예는 부룬디 최초의 후투족 대통령이 되었으나, 수 개월 뒤투치족장교 그룹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이 죽음은 부룬디를 심한 내전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은다다예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무수한 투치족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투치족 위주의 군대는 비슷한 수의 후투족을 학살하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이러한 불안정의 시기는 1996년 이전 대통령 피에르 부요야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을 때까지 이어졌다. 2000년 8월, 두 개의 정치 그룹을 제외한 모두가 동의한 평화 협상은 민주정치의 부활을 위한 일정을 계획하였다. 수 년의 폭력이 더 계속된 뒤에, 2003년 부요야의 정부와 가장 큰 후투족 반군 그룹인 CNDD-FDD 간에 휴전이 조인되었다. 그 후 FRODEBU 지도자 도미티엔 은다이지예는 부요야의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가장 극단적인 후투족 그룹 Palipehutu-FNL (일반적으로 "FNL"로 알려져 있다)은 아직 협상을 거부하였다. 2004년 8월 이 단체는 부룬디 서부의 가툼바 난민 캠프에서 152명의 콩고계 투치 난민을 학살하였다. 이 공격에 대한 반응으로 부룬디 정부는 FNL 지도자 아가톤 르와사와 파스튀르 하비마나에 대하여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테러단체로 규정하였다.
2005년 5월, FNL과 부룬디 정부간에 마침내 휴전이 합의되었지만 전투는 계속되었다. 재개된 협상은 FNL이 무기를 내려 놓는 대가로 포괄적 사면을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 현재 진행 중이다. 2005년 중반의 일련의 선거에서 이전의 후투 반군인 National Council for the Defense of Democracy-Forces for the Defense of Democracy (CNDD-FDD)가 승리하였다. 2006년 9월 7일, 두 번째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2006년에서 2015년까지
부룬디 재건의 노력은 실질적으로 2006년 이후에 시작되었다. UN은 평화유지 임무를 종료하고 재건을 돕는데 다시 집중하였다. 경제적 재건을 이룩하기 위하여 르완다, 콩고민주공화국, 부룬디는 "대호수 국가 경제 공동체"를 다시 발족하기로 하였다. 또한 부룬디는 르완다와 함께 2007년 동아프리카공동체(EAC)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2006년 9월 정부와 마지막 남아 있던 무장 반군 단체 FLN과의 휴전 조약은 완전히 이행되지 않았고 FLN 고위 구성원은 그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며 휴전 감시 팀에서 떠났다. 2007년 9월 수도에서 FLN 당파간 충돌이 있어 20명이 죽고 주민들이 대피하기 시작하였다. 모반자 단속이 다른 지역에서도 보고 되었다. 모반한 당파는 무장 해제 및 정치범 석방에 있어 정부에 동의하지 않았다. 2007년 후반과 2008 초반에 FLN 전투원들은 이전에 이들이 살았던 곳의 정부가 보호하는 수용소를 공격하였다. 시골지역의 집들도 약탈되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2007년 보고서는 개선이 필요한 많은 지역을 언급한다. 민간인들은 FLN에 의해 저질러진 반복적인 폭력의 희생자이다. 이들은 또한 소년병을 모집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도 높다. 범죄자는 구속과 처벌로부터 벗어난다. 사법 시스템에 대한 개혁이 시급하다. 인종청소, 전쟁 범죄, 비인도적 범죄는 여전히 처벌되지 않은 채이다. 표현의 자유는 제한된다; 언론인들은 정당한 직업적 활동을 한 이유로 자주 체포된다. 2007년 1월에서 11월 사이 총 38,087명의 부룬디 난민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008년 3월 말, FLN은 그들을 체포로부터 잠정적으로 면제시켜 주는 것을 보장하는 법안을 채택할 의회를 찾았다. 이것은 일반적인 범죄까지는 덮어주지만, 전쟁 범죄나 비인도적 범죄와 같은 국제 인권법 위반을 막아주지는 않는다. 정부가 이것을 과거에 사람들에게 주었지만, FLN은 잠정적 면제를 받지 못하였다.
2008년 4월 17일 FLN은 부줌부라를 포격했다. 부룬디 군대는 반격했고 FLN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새 휴전 협정이 2008년 5월 26일 승인되었다. 2008년 8월 대통령 은쿠룬지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장관 찰스 은콰쿨라의 중재로 FLN 지도자 아가톤 르와사를 만났다. 이것은 2007년 6월 이래 첫 직접 만남이었다. 양측은 평화 협상 동안 발생할 수 있는 어떤 논쟁이라도 풀어낼 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기로 동의하였다.
난민 수용소는 이제 문을 닫았고 45만명의 난민들이 돌아갔다. 부룬디 경제는 산산조각났다. 2011년 기준으로 부룬디는 세계에서 1인당 총 수입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이다. 난민들이 돌아옴과 함께 소유권 분쟁이 시작되었다.
부룬디는 현재 아프리카 연합 평화유지군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는 알샤밥에 대항하는 소말리아 임무를 포함한다.
2015 소요
2015년 4월 여당이 대통령 피에르 은쿠룬지자의 삼선을 발표하자 이에 대한 시위가 발생하였다. 시위자들은 은쿠룬지자는 세번째 임기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대법원은 - 비록 평결 시에 일부 구성원은 국외로 달아났으나 - 대통령에 동의하였다.
은쿠룬지자를 몰아내려는 5월 13일 쿠데타 시도는 실패하였다. 그는 부룬디에 돌아와 정부 구성원들을 숙청하고 쿠데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쿠데타 시도에 뒤따라 시위는 계속되었고 5월 20일까지 10만명 넘는 사람들이 국외로 도피하여 인권 비상 사태를 야기하였다. 불법적인 살인, 고문, 실종, 표현의 자유의 제약에 대한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인권 유린에 대한 보고가 있다.
국제연합, 아프리카연합, 미국, 프랑스, 남아프리카, 벨기에, 그외 여러 정부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집권당은 6월 29일 의회 선거를 실시하였으나, 이는 반대파에 의해 거부되었다.
1972년 부룬디에서는후투족들에 대한 계획된 인종청소가 있었고, 그 결과 250,000명으로 추산되는후투족과 온건투치족이 죽었다. 인종 청소에 참여한 사람들은 현 부룬디 정부가 모든 살인에 대하여 서로를 용서하도록 지속적으로 설득한 이후 석방되었다. 부룬디에서는후투족에 대한 다른 대량 학살도 있었다. 1988년 정부는 은테가와 마랑가라 지역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공격하였다. 1993년 부룬디 최초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후투족 대통령 멜콰이어 은다다예는 투치족 극단주의자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그의 암살은 후투와 투치 모두를 죽인 긴 내전으로 이어졌다. 1996년 은다다예의 암살과 그 여파에 대한 UN 보고서는 "소수파인 투치에 대한 인종청소는 1993년 10월에 자행되었다"고 결론내렸다. 이 보고서는 또한 투치족 위주 군대의 상급 거물들이 암살과 관련있음을 밝혔다. 부룬디에서후투족과투치족시민들 모두는 국가와 무장된 시민군들에 의해 조직된 대량 학살과 인종 청소의 대상이었다. 군대는 이전의 후투족 반란군과 투치족 정부군 모두로 이루어져 있다. 다인종, 다당제 민주정치의 회복은 부룬디의 갈등의 종결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품게 한다.
지리
부룬디의 지도부룬디 지역을 촬영한, 미 항공우주국의 위성 사진.부룬디 및 주변 지역을 찍은 위성 사진.
땅은 대부분경작지또는목초지인데, 이렇게 만듦에 따라 산림 벌채,토양침식, 서식지 상실이 일어났다. 산림 벌채는 인구의 지나친 증가에 따라 전국토에 걸쳐 일어나서 단지 60,000헥타르 정도만이 남았으며 지금도 매년 약 9%씩 진행되고 있다.[2]국립 공원은 두 개 있는데, 북서부의 키비라 국립 공원(르완다의 Nyungwe Forest 국립공원과 인접한 저산대 우림)과 북동부의 루루부 국립 공원(Rurubu(또는 Ruvubu나 Ruvuvu라 알려진) 강을 따라 있다.)이다.
나일강의 가장 먼 원류는 부룬디에 있다. 비록빅토리아호가 일반적으로나일강의 수원으로 생각되지만,카가라 강은 빅토리아 호에 이르기 전 690km를 흐른다. 카가라 강의 상부 지류루비론자 강은 부룬디의키키지 산에 있다.